일본 글을 작성하고자 마음 먹은 생각의 시작은 약 1년 전 한국 경제에 대한 심각성을 느낀 후였다. 당시 강하게 들었던 생각은 ‘해외로 나가야지’였고, 미국 대학 편입 학원에 상담까지 하며 마음을 강하게 먹었었다. 이에 대한 연장선으로 2025년이 되자마자 싱가포르와 홍콩을 다녀왔는데, 그간의 생각 변화를 정리해봤다. 글보다는 메모로 가볍게 읽어주셔도 좋을 것 같다.
해외진출의 목적
자본주의의 근간인 금융은 자본을 효율적인 곳으로 배치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시장은 대체로 효율적이기에 일시적인 변화가 아니라 큰 흐름에 변화가 생겼다면 그 흐름 정답일 확률이 매우 높다. 현재 국내 금융은 자본을 해외로 배치하고 있다.
이는 지난 글에서 언급한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대표적인 금융시장 측면의 원인으로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들 수 있지만, 이를 유발하는 요인들은 점차 해결되면서 오히려 새로운 기회를 창출할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출산율, 기술 수준, 성장률 등 거시적 요소를 고려했을 때, 산업과 기업의 영업 환경 악화가 가져온 영향이 쉽게 회복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더욱이 해외로 옮겨가는 기업들의 투자는 이러한 흐름을 굳히는 동시에, 국내 소비로 이어질 수 있는 기업 이익마저 해외로 빠져나가게 만든다. 중요한 점은 효율적인 시장이 그런 구조적 한계를 인식하고 자본을 해외로 돌리고 있으며, 국내 산업이 처한 암울한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이 잘되면 투자가 잘되고, 투자가 잘되면 기업이 잘되는 선순환 구조가 모두가 이익을 누리기 좋은 환경일텐데 한국은 적어도 내가 필드에 있는 기간 동안은 이러한 구조가 형성되기 어려워 보였다. 당장 20년 뒤에는 생산가능인구가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주변 투자자들과 얘기할 때 농담반 진담반으로 지금의 조선 산업이 한국의 마지막 호황 싸이클일 것이라고 해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진담에 가깝다.
상장 주식에 투자한다면 해외 투자가 자유로우니 정보 접근이 약간 제한되는 것 말고는 지장이 없지만 현재 커리어 목표는 명확하게 성공한 PE 운용역이 되는 것이다. 비상장 주식에 투자하는 PE업은 로컬 비즈니스이기에 해외 기업에 투자하려면 해외로 나가야 한다. 이것이 첫번재 이유였다.
두번째 이유는 도전정신이었다. 전세계 누구든 ‘금융’하면 미국, 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나 홍콩을 떠올릴 것이다. 한국이라는 답변을 들으려면 한참 국가의 나열을 듣고 있어야 한다.
언젠가부터 커리어에서 돈을 중요한 요소로 삼지 않는데, 돈을 벌고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을 너무나 많이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커리어를 고민하며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싶은 지보다 어떤 일을 하고 싶은 지에 집중했고, 답은 ‘성취감’이었다. 기업 보고서를 완성하고 나서는 작성한 보고서를 몇번이고 다시 보며 뿌듯함을 느꼈고, 분석한 내용이 맞아 수익을 내면 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수익을 내서 좋다기보다는 내 보고서가 맞았다는 사실, 분석에 성공했다는 사실 자체가 좋았다.
그렇기에 한국보다는 해외에서 성공하고 싶었다. 한국보다는 싱가포르의 성공한 투자자가 되는 것이, 싱가포르보다는 미국의 성공한 투자자가 되는 것이 더 큰 성취감과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변함 없이 적어도 젊은 시절에는 기댓값 재지 않고 도전하고 깨지는 경험을 하고 싶다.
전세계 천재 공대생들이 실리콘밸리로 진출하는 것처럼, 내가 투자자로서 월스트리트에 진출하고 래플스 플레이스(싱가포르의 금융 1번지)에 진출할 수는 없을까? 이것이 고민의 시작이었다.
싱가포르에서의 경험
싱가포르를 방문하게 된 계기는 학교의 국제교류 동아리이다. 1년에 두번 한국, 중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의 대표 대학교 학생들이 모이는데, 학교별로 돌아가면서 타국 학생들을 맞이해 경영경제에 관해 토론과 발표를 진행하고, 해당 국가의 대표 기업을 방문하는 등 의미 있는 활동이 많아보였다. 이번에는 싱가포르대학교가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타이밍이었고, 이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4박 6일간 다녀왔으니 긴 기간은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 싱가포르에 대한 조사도 하게 되었고 나름 얻은 것은 많다.
비상장 투자자로서 해외진출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렵다.
프로그램 마지막 날 시니어 세션이 있어 알럼나이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마침 서울대를 졸업하고 싱가포르 헤지펀드에서 일하고 계신 분도 있었다. 대화한 후 느낀 점은 투자자로서 해외진출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다.
내가 던진 첫번째 질문은 ‘헤지펀드에서 어떤 투자를 맡고 계신가요?’였고, 답변은 한국·일본 시장 롱숏이었다. 이분을 만난 다음날 링크드인으로 홍콩과 싱가포르 투자 업계에 있는 한국인들의 프로필을 거의 모두 조회해봤는데, 실제로 한국 시장 투자를 맡고 있거나 아니라면 학창시절을 해당 국가에서 보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단 해외진출을 위한 이유 1번이 무너졌다. 해외진출의 목적이 한국의 전망을 어둡게 봐서인데, 해외에 나가서 한국 시장에 투자하고 있다면 모순되지 않는가? 물론 페이를 생각하면 같은 시장에 투자해도 한국보다 해외에서 일하는 것이 낫긴 할거다. 하지만 해외를 페이 때문에 나가고자 마음 먹은 건 아니다.
두번째 질문은 ‘해외 PE에서 일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였다. 헤지펀드와 PE의 투자처는 많이 다르고, 투자 스타일도 다르기에 던진 질문이었다. 답변은 애매하게 말씀하셨지만 약간은 부정적이었다. 이유는 해외 PE에서 영어 수준도 네이티브가 아니고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한국인을 채용할 유인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PE는 로컬 비즈니스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면 제한이 생길 수밖에 없다. 말을 줄이고 수익으로 증명할 수 있는 헤지펀드와 달리 PE는 딜 소싱부터 엑싯까지 말, 소통의 과정이 빠질 수 없다. 알고 있지만 해외진출에 대한 욕심에 외면해왔던 생각을 마주하게 됐다.
도전정신을 위해서라면 싱가포르는 좋은 선택지가 아닐 수 있다.
언제나 마음 깊은 구석의 진실을 마주하는 것은 어렵다. 보통은 회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귀국 전날 싱가포르 IB에서 근무하시는 다른 분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이분은 미국 MBA를 갈 생각이라고 하셨다. 목적은 미국 진출이었고, 그간 해외에서 일해보니 미국을 제외하고는 국가별로 큰 차이가 없다고 하셨다.
미국이 세계 패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고, 금융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미국이 아니라 싱가포르나 홍콩을 노린다는 건, 사실 아시아권에서 벗어나기는 두려운 마음이 내재해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해당 국가에서 살아왔거나,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거나, 미국 진출에 실패한 경우는 제외지만 말이다.
나 역시 그러했던 듯하다. 미국으로 가면 내 학벌은 거의 의미가 없어지고, 모든 일이 처음부터 시작이다. 정말 큰 시장이지만, 티끌만큼도 영향을 주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생각에 두려움을 가지고 미국이 아닌 아시아권 국가를 고려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항상 도전을 외치지만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홍콩에서의 경험
홍콩은 싱가포르처럼 프로그램이 목적은 아니었고 개인적으로 방문했다. 해외로 진출한 한국인 투자자들의 생각을 듣고 싶어 링크드인으로 50명이 넘는 분들께 콜드메일을 보냈고, 그중 몇분을 만나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싱가포르에서 느낀 점과 동일하다.
역시나 헤지펀드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한국 시장을 대응하고 계셨고, 비상장이나 채권 투자를 하시는 분들은 중고등학교 시절을 홍콩에서 보낸 분들이 대다수였다. 그리고 신기할 정도로 싱가포르에서 들은 것과 동일하게 미국 아니면 큰 차이가 없다는 말씀을 해주셨고, 차라리 커리어를 쌓아 미국 MBA를 도전해보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친한 동료라 하더라도, 부모님이라 하더라도, 현직자라 하더라도 조언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대다수의 의견이 일치하고 그 이유가 논리적이라면 그 의견을 따르는 것이 맞다. 미국으로 MBA를 가는 선택은 커리어를 시작한 후의 결정이기에 잠시 미뤄두기로 하고, 일단 졸업 직후 해외진출에 대한 생각은 접게 됐다.
한국에 거는 기대
사실 싱가포르를 방문하기 전까지 금융허브라는 점 외에는 싱가포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어떻게 산업 기반이 거의 없는 국가가 금융허브가 될 수 있었는지부터 날씨는 어떤지까지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하지만 싱가포르에 대해 공부하고 방문해보니 한국도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무역 중심지 영향도 컸지만, 지금의 싱가포르를 만든 건 리콴유 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세한 싱가포르의 성공 공식과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추후 한 편의 글로 작성하겠지만 지금까지 알아본 바로는 누군가 문제점을 알고, 고치려 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생각보다 문제 해결이 쉬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싱가포르의 성공에도 거대한 계획과 원대한 실행 따위가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가장 충격받은 것은 K-something이다. 데이터로도 나오긴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K-something의 파급효과는 굉장했다. 어디를 가나 한국 노래가 흘러나오고(절대 관광지가 아니다) 교류한 다른 국가 학생들이 한국 아이돌은 나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한 한국 드라마·음식·화장품 등을 ‘한국’의 제품이나 서비스로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일부분으로 소비하고 있었다.
한국인은 마케팅을 잘한다는 사실이 그동안 생각해온 K-something의 성공 이유인데, 그보다는 이유가 더 복잡하지 않나 싶다. 마케팅이 이유라면 구조적인 성장이 아니라 일시적인 성장으로 멈출 수 있지만, 적어도 내가 느낀 일상생활의 일부분으로서의 K-something에 대한 소비는 지속될 것으로 보였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만 저도 실제로 홍콩에 가보고 가서 네트워킹 해본 결과, 한국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역시나 금융 규제의 차이로부터 기인하는 여러 형태의 하우스더군요. 결국 홍콩이든 싱가폴이든, 한국의 금융시장보다 job을 찾는다는 측면에서는 훨씬 더 많은 기회가 있다고 네트워킹을 한 분들이 말씀해 주셨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 역시 해외 IB/PE를 목표로 MBR님의 글을 항상 잘 읽고 있는데, 다양한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